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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충민공 임경업 장군(1594~1646)
을 모신사당으로 충주시 단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렬사 진입로
바로 앞에는 단월 단호사가 그리고 뒤로는 충주 건국대학교 캠퍼스가 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년) 이 곳 충주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출중하였으며 광해군 10년(1618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낙안군수,정주목사,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의주부윤,평안도 병마 절도사 겸 안주목사 등 요직을 두루 맡아 선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국토방위를 위하여 대외항전의 일선에서 많은 공헌을 남겼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크게 동요되었을 때 장군은 반란군을 진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정묘,병자호란을 당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장군은 백마산성,의주성등을 수축하여 국방강화에 전력하는 한편 반청친명의 확고한 신념으로 청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으니 실로 장군은 나라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군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의 모함에 의하여 억울한 일생을 마쳤다.

충렬사 - 임경업 장군충렬사 - 임경업 장군
충렬사 - 임경업 장군충렬사 - 임경업 장군

그 후 억울하게 죽어간 임장군의 공적이
후세에 인정되어 숙종 23년(1697)에 왕명으로 충주 단월 이곳에 충렬사를 건립하고 영조 3년(1727년)부터는 춘추로 향제를 올려 오던 차 197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충렬사를 성역화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새로이 정회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충렬사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과 임경업 장군의 유품들을 전시한 유물관, 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다는 "어제 달천 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장군의 부인 완산 이씨의 충절을 길인 완산이씨정렬비각(完山李氏貞烈碑閣)가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장군이 사용하던 칼,추련검이 있으며 이는 호신용으로 쓰던 3척밖에 안 되는 단검이다. 전투에 사용하던 칼은 용천검이라 하는데 이는 일본사람들이 훔쳐가 없어지고 그 칼에 대한 일화와 칼 위에 쓴 장군의 시 한수만 전할 뿐이다.

충렬사 - 임경업 장군충렬사 - 임경업 장군

광해군 10년(1618년), 25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삼수의 방위를 위해 소농보 권관이 되었을 때 어느날 큰 못가를 거닐다가 한 마리의 용이 입에 물고 나온 단검을 얻게 되었는데, 이 칼을 기념하기 위해 즉석에서 '용천검(龍泉劍)'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三尺龍泉萬卷書(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서적과 같다.)
皇天生我意何如(하늘이 나를 냄은 어인 뜻인가.)
山東宰相山西將(산동에 재상나고 산서에 장수난다는데)
彼丈夫兮 我丈夫兮(저들이 대장부면 나 또한 대장부가 아니냐)


지금 충렬사 유물관에 있는 추련검(秋蓮劍)에도 역시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時呼時來否再來(때여 때는 한번 와서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都在筵(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네)
平生丈夫報國心(장부의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三尺秋蓮磨十年(삼척 추련검을 십년이나 갈았네)

충렬사 유물관- 임경업 장군충렬사 - 임경업 장군

 

임경업 장군과 관련하여 충주 지방네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년시절 군사놀이
장군은 유년시절부터 전쟁놀이를 즐겨 하였으며 항상 대장을 일삼는 꼬마 장군이었다.
하루는 돌을 모아 성을 쌓고 군기를 날리면서 진을 치고 진중에서 놀고 있던 중 경주로 부임차 길을 가던 목사 윤진의 행차가 그 곳을 지나 가게 되었다. 윤진이 빨리 길을 비키라고 호령을 하니 임경업이 나와 "사람이 성을 피해야지 성이 어찌 사람을 피하겠소" 당당하게 맞섰다.
이에 윤목사는 장차 큰 인물이 되라라 짐작하고 일부러 아이들 돌성을 피하여 먼길을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임경업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임장군의 부인 완산이씨
인조 16년 장군이 50세 때 3월에 명나라로 갈 것을 결의할 때 이미 임장군의 처인 이씨 부인은 청나라로 붙들려가서 끝까지 항거를 하는데 말하기를
  "우리 주인은 병자호란 때에 굴복한 우리나라의 원수인 너희 놈들의 원수를 갚는 동시에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대절을 지키고 있는 천하 충신이거늘 내 어찌 그러한 충신의 아내로서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
하고 외치더니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였다 한다.

충렬사 - 임경업 장군충렬사 - 임경업 장군


** 오추마
임경업 장군과 희비고락을 같이 하던 말이다.
숙종때 임경업 장군이 죽은 줄 알게 된 말은 양주 땅 어느 농가에서 먹지도 않고 굶더니 끝내 자살 행위를 하므로써 주인의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초대
대림산 기슭에 무예 연마를 위해 세 단계의 석축을 직접 쌓아 매일 세 번씩 오르내리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 아직도 석축을 쌓은 곳이 현존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벽(측암절벽)을 세 발자국에 뛰어내리고 뛰어오르고 했다하여 삼초대라고 전한다.

삼초대 - 임경업 장군달천강 노루목에서 바라 본 삼초대와 대림산 자락


** 이심바위
대림산 아래에는 달천강이 흐른다.
유즈막에서 노루목으로 들어가는 구 3번 국도 변에 큰 바위가 있었다. 임경업 장군이 젊었을 때에 매일 새벽 삼초대 절벽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달천 강물을 표주박으로 떠서 마시는데 하루는 물을 떠 마시려 하자 물 속에서 갑자기 큰 이무기가 한 마리 나와 장군을 해치려 하므로 장군이 그 꼬리를 잡고 바위에다 태기를 쳤더니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았었는데 도로 확장공사 때 없어 지고 말았다.  

 

 

 

 

 

충렬사는 충주시가지를 우회하여 수안보, 문경 상주로 향하는 우회도로 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변으로 단호사와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가 있어 찾는데는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3번국도를 타고 달천강을 건너 충주로 진입하다 보면 철길 위를 지나는 고가도로를 넘어 첫번째 사거리가 나옵니다.
좌측으로는 충주댐을 비롯 원주 제천 방면이고 우측으로는 수안보 문경 우회도로입니다.
이 곳에서 자동차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건국대학교가 있습니다. 충렬사와 단호사는 건대 정문을 지나 300여m 더 내려가면 나오게 됩니다.
횡단보도 신호등 우측으로 우람한 느티나무와 조그마한 절이 보이는 곳이 바로 단호사입니다
그 앞으로 충렬사를 가리키는 안내판과 진입로가 나 있습니다.  진입로로 들어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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