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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업 장군을 따라 답사여행 - 봄
  

 ◆ 임경업 장군을 따라  -- 답사여행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장군은 충주 태생으로 충주 주변 곳곳에 장군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 및 설화들이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번 답사 여행 코스는  충렬사를 시작으로   충렬사 -> 임경업 장군 묘소 -> 삼초대 -> 임경업장군 사우, 순서로 돌아봅니다.
그외 낙안읍성, 속리산 경업대등등이 임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내려오는 장소이나 이번 여행길에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임경업장군은 당시 친명배청(親明排淸)을 일관되게 주장한 장군입니다. 요즘 역사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광해군과 더불어 당시 광해군의 명을 받들어 어쩔 수 없이 후금에 항복을 한 강홍립장군이 있습니다. 동시대를 함께한 두 장군의 애국에 대한
가치관을 번갈아 생각해 보며, 이 답사여행을 가 봅니다.

임경업장군에 대한  간략한 소개...

임경업 장군은 조선 선조 27년(1594년) 판서 임정의 후손이며, 임황의 아들로 충주 단월 가까운 대림산 아래 풍동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10년(1618년), 25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삼수의 방위를 위해 소농보 권관이 되었으며,인조 2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는 등 혼란에 빠졌을 때 임경업 장군은 길마재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혼란을 틈타 나타난 도적떼들이 훔쳐갔던 국고의 금은보화를 되찾아와 국가의 재산을 지켰다.
이로 인해 "진무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듬해인 인조 3년에는 첨지중추부사겸 우림위장이 되었으며 방답첨사로 다시 이듬해인 인조 4년 낙안군수가 되었다.

인조12년(1634년) 5월 부친 탈상을 끝내고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가 되었으며 더불어 후에는 의주진 병마첨절제사의 벼슬을 덧붙여 받았고,

인조 13년에는 종2품격인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인 인조 3년에는 첨지중추부사겸 우림위장이 되었으며 방답첨사로,...

다시 이듬해인 인조 4년 낙안군수가 되었다.

이 무렵 만주에는 후금이 요동지방으로 진출하면서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후금의 태종 홍타시는 명을 공격하기에 앞서 우선 배후의 조선을 먼저 쳐서 후환을 없애려고 하였다.

인조 5년(1627년), 후금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가 즉위한 것 - 인조반정 - 은 부당한 처사라는 구실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으나 형제의 맹을 맺고 돌아갔다.(정묘호란)
이 무렵 일부에서는 청북지방을 방어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버리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에 임경업과 청북의 지방관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한 번의 병화로 가볍게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의론이 정해지지를 못 하였다.

인조 9년 부친상으로 충주 달천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 있던 중에 청북의 백성들이 서울에 올라와 대궐 앞에 엎드려 청북지방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이 사건을 김자점은 필히 임경업이 뒤에서 조정한 곳이라 하고 영을 내려 임경업을 잡아 올렸다.
이에 임경업은 '상복을 입고 있는 내가 어찌 그런 일을 지시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변명을 하여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 곧 석방될 수 있었다.

인조11년 임경업의 나이 40세에 청북방어사가 되고 이내 영변부사가 되어 서북지방 중요 산성인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의주의 성첩 역시 보수하여 변방인 서북지방을 굳건히 지켰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 등이 "우가장"으로 도망와서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청과 내통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임경업은 명나라군과 함께 공유덕 반군을 모두 섬멸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벼슬까지 얻고 이름을 명나라에까지 드날리었다.
이 해에 임경업은 부친의 탈상을 위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왔다.

다음해 인조12년(1634년) 5월 부친 탈상을 끝내고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가 되었으며 더불어 후에는 의주진 병마첨절제사의 벼슬을 덧붙여 받았고,
인조 13년에는 종2품격인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부임하자마자 임경업은 비록 후금과 화친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후금은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어 방어 차원에서 군력 증원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화에 시달리고 유랑하는 백성들을 구제코자 또다시 상소를 올려 겨우 은 천냥과 금단 백필을 얻어 상평창을 설치하고 명나라상인들과 무역을 하여 집없는 자에게는 집을 지어 주고 홀아비와 과부들에게는 각기 베필을 얻어 살게 하니 각처에서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몰려왔다. 또한 땅을 개간하고 장정들에게 훈련까지 시키면서 방위와 안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후금인들을 잡아서 크게 호통을 치고 돌려보낸 일을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허위 보고 되어 관직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간곡한 호소와 새로 부임한 의주부윤 이준이 백성들의 뜻을 잘 전달하여 이듬해(인조14년)에 다시 의주부윤으로 복직되었다.
이 해(1636년)에 후금의 태종은 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임경업 장군도 청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봉수대를 높이 쌓아 적진을 탐정하고 비변사에 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알리고, 해서지방 군인 2만명을 준다면 결사 방어할 것을 의뢰하였으나 간신들의 반대로 거절되고 말았다.



병자호란
청 태종은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신하의 국가가 될 것을 요구했으나 조정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인조 역시 청의 사신을 인견하지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청태종은 인조 14년(1636년) 12월 초 여셋날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청의 대군은 전략적으로 임경업 장군이 있는 의주를 피해서 서울로 직접 공격해 내려왔으니 태평만을 꿈꾸던 여러 읍성들은 감히 적에게 맞서지 못하였다.
인조는 여러 왕자와 비빈 및 그 밖의 가족들을 급히 강화도로 피신시켰으나 왕 자신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40여일만인 이듬해 정월 30일에 왕은 친히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고만다.


<<  여진(청나라)과 조선의 관계변화>>
    임진왜란 당시 여진의 누르하치(후금)집권 때만 해도 조선은 여진의 부모의 나라로 수직적 관계....
   1627년 (인조5년) 정묘호란의 계기로  형제의 국가로 수평적관계,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으로 종래의 수직,수평적 관계가
    역전되어  조선은 청의 종속적 국가로 강등...
    이로부터 약 250여년 조선은  청에  사대의 예로 대하였으며 대체로 청의 종주국 행세는 형식적이었던 것으로, 조선은 내정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세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말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조선총리로 임명되면서 노골적인
    종주국행세를  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면서, 조선은 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지만, 일본에 또 다시 국치를 당하게
    된다....



청나라는 평안도 앞바다에 있는 명나라 군사기지인 가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사를 요구하고 같이 공략할 것을 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임경업에게 청나라를 원조할 것을 명하였다.
명나라군사를 친다는 것은 임경업에게는 당시 괴로운 일이었다. 이에 임경업은 우리나라 군법에는 선봉이 성을 깨뜨리면 성안의 재물은 모두 선봉의 장수가 차지하게 된다고 꾀를 부려 선봉장을 피했다. 그리고 가도에 몰래 척후병을 보내어 준비케 하여 책임자인 "섬세괴"만 전사하게 되었다.

인조 23년 정월의 일이었다. 임경업은 곧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청태종은 그의 항복을 받아 내려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임경업은 내 목을 벨 지언정 너희 오랑캐와 같이 머리를 깍을 수는 없다는 태도로 변발할 것을 반대하였다.
인조 22년에 조선에서는 상신 심기원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었다. 심기원이 임경업과 같이 음모했다고 허위 자백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임경업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환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청태종은 이를 허락하여 임경업을 내 주었다. 서울에 도착한 임경업은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심문의 주 요점은 심기원과의 공모 여부였으나 임경업은 명나라를 왕래하느라 조선에 없었으며 심기원과는 친한 사이도 아님이 참작되었으나 좌의정 김자점이 임경업을 몹시 시기하여 어떻게든 그를 죽이려하였다.
심기원과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지 않자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형리들의 매질로 숨지게 하였다.
죽음에 임한 임경업은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 하고 탄식을 금치못했다 한다.

임경업은 김자점의 독단적인 계획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김자점도 역적으로 몰려 무참히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임경업의 충성심이 크게 빛나게 되었다.숙종23년(1697년)에 특명으로 복관되고, 숙종32년에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 후 청은 그 가족들을 모두 잡아 심양까지 끌어갔다가 처만 남겨 놓고 모두 돌려보냈다. 처만은 임경업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매일 고문을 하였으나 장군의 아내답게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 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였다.
또한 타고 다니던 준마도 금교역에서 고삐를 풀어 놓아 보냈는데 그 후 말은 사복사 마굿간에 돌아왔다가 주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세 번 울부짖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한다.

영웅의 아내는 아내답게, 영웅의 말 역시 영웅의 말답게 마지막을 장식했다. 영조 2년(1726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열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3년)에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조15년(1791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충렬사 - 임경업장군

임경업 장군 묘소 - 임경업장군

삼초대(임경업 장군 무예 수련장소) - 임경업장군

 

충렬사는 숙종 23년(1697)에 왕명으로 충주 단월에 건립되어 영조 3년(1727년)부터는 춘추로 향제를 올려 오던 차 197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충렬사를 성역화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새로이 정회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곳입니다.

충주시가지에서 건국대학교 방향으로 이동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건국대학교 정문에서 단월강방향(수안보방향)으로  300여m 내려 가면 좌측으로 충렬사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옵니다.
진입로 좌우로는 은행나무들이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는데 매년 가을이면 노란빛깔로 진입로를 멋들어지게 합니다.

넓은 주차장에 주차하고 매우 저렴한 입장료를 내고 경내로 들어갑니다.

 

충렬사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과 임경업 장군의 유품들을 전시한 유물관, 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다는 "어제 달천 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장군의 부인 완산 이씨의 충절을 길인 완산이씨정렬비각(完山李氏貞烈碑閣)가 있습니다.
경내는 다소 단촐하며 아기자기합니다.. 들어가자마자 우측으로 임경업 장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관이 있습니다.
유물관에 들어서면 장군이 사용했다고 하는 추련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추련검은 지휘용으로 사용한 검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추련검(秋蓮劍)에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장군의 애국심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時呼時來否再來(때여 때는 한번 와서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都在筵(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네)
平生丈夫報國心(장부의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三尺秋蓮磨十年(삼척 추련검을 십년이나 갈았네)

 

"어제 달천 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

 

마지막으로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을 뒤로하고 아담하게 조성된 연못가에 나와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장군의 생애를 돌이켜 봅니다.

 

충렬사를 벗어나 단월강을 가로 지르는 단월대교를 넘고 풍동으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5분여 정도 가면 길 왼쪽으로 큰 느티나무가 보이며 우측으로 안내판과 함께 마을이 나타납니다. 몇 채 안되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입니다.느티나무 아래로는 논이 펼쳐져 있으며 충주외곽순환도로 건설이 한창입니다. 강 건너엔 상수도 취수장이 보입니다. 장군의 묘소는 마을 뒷산에 모셔져 있습니다.
묘소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합니다.장군의 묘는 정확하게 월악산 영봉을 바라 보고 있습니다.



다음 답사지는 임경업 장군의 무예수련장인 삼초대입니다.삼초대는 대림산 서쪽 명당암석 아래 일련의 바위를 일컬으며 임경업 장군이 무예 연마를 위해 세 단계의 석축을 직접 쌓아 매일 세 번씩 오르내리며 심신을 단련하던 곳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아직도 석축을 쌓은 곳이 현존하며  장군의 묘지에서 단월강을 건너 바로 보이는 암벽벼랑이 삼초대입니다..


삼초대로 가는길은 장군의 묘지에서 나와, 왔던 길로 되돌아 가 단월대교를 건너고 수안보 방향으로 갑니다.
흐뜨러진 버드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유서깊은 유즈막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 곳은 구 3번국도와 신 3번국도가 갈라지는 곳으로
삼초대로 이어지는 길은 구 3번국도입니다.  삼거리에서 우측 소로를 따라 내려가면 단월강을 우측에 두고 버드나무 가로수길을 만나게 됩니다.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정심사란 절 입구가 나옵니다.  절 입구에 서 있는 벼랑이 삼초대입니다.

 

정심사를 오르며 바라 본 삼초대 절벽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벽(측암절벽)을 세 발자국에 뛰어내리고 뛰어 오르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삼초대 절벽 꼭대기에서 바라 본 단월강 노루목일대입니다. 장군은 이 곳까지 올라 무장으로서의 호연지기를 키웠겠지요..
장군의 무예 훈련장소는 이 곳 말고도 속리산 경업대 암봉이 있습니다...
속리산을 가면 꼭 한 번 가 보아야겠습니다.

 

 

삼초대를 내려와 마지막 여행지인 살미면 세성동에 소재하고 있는 임경업장군 사우로 향합니다.
조선현종 9년(1668년)에 창건되었고, 1984년 다시 중건된 사당으로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배향하며 향사하고 있는 곳입니다.
단월동의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에 비하면 규모는 작은 편입니다.

사우 앞 좌측으로는 "쌍효각"(충열문)이 서있는데, 이는 조선 정조 12년(1788년)에 명정된 정려로써 영의정 김자점의 모함으로 처형된 장군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장군 서거 100일만에 할복 자살한 정경부인 전주 이씨의 충렬을 찬양하기위하여 건립된 것입니다.

 

삼초대를 벗어나 뒤 돌아 본 풍경입니다.

 

"쌍효각"(충열문)


이로써 임경업장군의 유적지를  따라  돌아본 답사여행은 끝납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여행이라기 보다는 장군의 생애를 되 돌아 보는 무겁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진지한 답사길이었습니다.

흔히들 얘길하길 시대를 잘못 태어난 명장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장군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이 말은 장군에게 꼭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

장군이 억울한 죽음에 이르러 외친 말이라 합니다...

 

2007-04-10 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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